어떤 날은 귀하게도 부산에 눈이 내렸다. 눈이 오는 부산을 두고 서울에 도착했더니 검은 아스팔트가 그대로 보여서 이상했다. 들쑥날쑥한 날씨는 겨울을 겨울처럼 인식하는 것에 약간의 혼동을 주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연말도 연말 느낌이 나지 않고. 내가 떠올리는 연말은 몽글한 입김들이 밤거리를 밝힌 전구들 아래로 저마다의 행복을 나누는 그런 건데. 입김이 나오기도 전에 얼어붙어 있다. 거꾸로 흐른다. 내가 가진(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가진) 연말에 대한 환상적 이미지는 사회가 부추기는 소비상에 기반한 것이라거나 다소 낙관적인 시선에 절어있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세상은 꿈 같지만은 않다. 유튜브에서 내가 가장 많이 누르는 콘텐츠 중 하나는 뉴스 보도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을 마주한다. 무법자는 늘어나고 도덕적이어야 할 이유를 자꾸 잃어가는 이상한 시대애서 따뜻한 입김은 함부로 숨을 쉬기조차 힘든 것 같고. 최근에 이슈가 된 어떤 사건에서 나도 모르게 감정을 배제한 무심한 말을 내뱉었을 때 속으로 놀랐다. 그나마가 인지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차마 부끄러워서 무슨 내용이었는지 적지는 못하겠지만. 내 숨의 온도도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사실이 유감일 뿐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한편 일상 속의 나는 너무나 잘 지내고 있음이 부끄럽다. 내가 잘 지내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이 있었으면서도 또 다시 나는 비슷한 부끄러움을 느껴버린다. 지난 일년동안 가장 많이 웃고 행복해했다는 사실이 자꾸 모순이 된다. 어쩌면 이것도 내가 지나야 할 성숙의 관문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는 혼란스러움을 놓지 못했어서. 언제 다시 매서운 추위가 닥칠지 모르는 올 겨울 추위랑 닮았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대부분의 날이 따뜻했으면서.
거취를 본격적으로 옮기기에 앞서 많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조금 더 자주 웃고 행복하기 위해서 결정한 것들이 계속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생각이 많아진다. 뱉어내지 못한 사념들이 덕지덕지 묻은 하얀 벽지를 뒤로하고 미래의 나에게 간다. 짐을 챙기면서 버릴 게 정말 많다고 생각했다. 물건을 잘 못 버리는 사람은 이런 게 힘들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거늘, 머리는 알고 있지만 가슴은 싫다 한다. 물건이든 뭐든.
스스로 꼬장꼬장 꼰대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나도 요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요즘 사람들이라고 여길 때다. 특히 일터에서 그런 경우가 몇 차례 있었는데, 그럴 때 기분은 역시 꽤 별로다. 솔선하는 일은 만족감을 주지만 보람을 다른 이에게서 찾으면 안된다는 것을 또 다시 배워가고.
두서없는공상이돌고돌고돌아서결국나에게다시돌아온다.
여러 일을 나는 나 하나의 마음으로 소화하고, 그런 나의 마음은 주변의 마음으로부터 영향받아 만들어진 산물이고. 결국 나로 다시 돌아오는 생애의 긴 비행. 절대 맞닿을 수 없는 지름의 굴레처럼 나는 나에게로 계속해서 돌아온다. 그러다 보면 하나의 큰 둥근, 나라고 여겨지는 원이라는 게 그려지겠지 하고,
고개를 들어 둥근 모양을 찾아본다. 언제나처럼 떠있는 달이 보인다.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것을 이제 서른 번 가까이 겪어왔으면서도, 그저 오늘이 365일 중의 하루임이 똑같은 것을 알면서도- 넘어가는 숫자가 가진 확연함에 과거를 떠나보내는 느낌이 드는 것이 생경하다. 한 해를 넘긴다는 것은 이렇듯 매일과 같으면서도 다른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또 등장하는 지름의 굴레다. 이맘때 쯤이면 보통, 새해 다짐이라든지, 지난 날에 대한 반성이라든지를 하기 마련이었는데 이번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조금은 초연해진 느낌. 2023년이 2024년으로 이름을 바꿀 때에 나는 나의 이름을 바꾸지 않는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기 때문인걸까.
그간 써왔던 기록들을 떠올린다. 대개 내가 뭘 했었는지, 뭘 느꼈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과거를 끌어오는 일에 익숙한 나는 계속 뒤를 돌아본다. 나는 내가 아직도 과거에 살고 있는 사람인가를 잠시 고민했다. 돌이켜보면 꽤 오랜 시간 그래왔던 것 같다. 제대로 마음을 일으키기 어려웠던 날들은 마치 끊임없이 뒤로 굴러가는 기억의 쳇바퀴에 등이 달라붙은 것처럼 나를 더 어지럽게 했다. 어떤 계기로 나는 쳇바퀴를 서서히 멈추고 등을 일으키고 있다. 그 계기가 나를 끌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계기 또한 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걸 또 다시 깨닫고, 동시에 다짐하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쳇바퀴를 시계 방향으로 돌린다. 그곳에는 어떠한 저항도 없어서 모종의 장애물이 부딪히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일의 나는 조금 나에게 가까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